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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월 24일 오전 8시 50분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사망한 그를 따라 임신 9개월의 몸으로 투신함으로써 짧은 이승의 삶보다 긴 영원 속에서 모딜리아니와 함께 있기를 택했던 그녀는 살아서는 그의 최상의 이해자였고, 반려였으며 목숨까지도 바친 여인이었다.

여학생처럼 청순한 처녀가 몽파르나스의 로톤드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눈동자도 머리 빛도 밝았던 이 처녀는 모딜리아니 등의 예술가들이 모여앉아 있는 쪽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기도 했다.

들리는 말로는 그림 공부를 해보려고 몽파르나스에 온 것이라고들 했다. 얼마 후 이 청순한 처녀인 쟌느 에퓨테른느가 모딜리아니와 서로 팔짱을 끼고 몽파르나스 거리를 지나가는 정경을 사람들은 목격하게 된다. 드디어 모딜리아니도 행복을 잡았구나 하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La vie est belle...

그녀는 모딜리아니의 생의 반려가 되며 앞으로 삼년간 로톤드의 맞은편 그랑 쇼미엘 거리에 셋방을 얻어 같이 살게 된다. 한때나마 안정된 시기가 찾아오며 모딜리아니의 독자적인 표현 양식은 급속도로 만개하게 된다.

모딜리아니는 칸느의 축제에서 쟌느 에퓨테론느를 만났다. 아카데미 콜라로시에서 그림을 배우며 화가가 되기를 꿈꾸고 있던 열아홉 살의 쟌느에게는 슬프고 불행한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쟌느는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곧바로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진 쟌느는 밤색머리를 땋아 둥글게 올리고 다니곤 했기 때문에 친구들은 그녀에게 느와 드 코코 (야자열매라는 뜻)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1918년 11월, 즈보르프스키 부부의 주선으로 니스에 내려가 있던 쟌느는 딸 지오바나(나중에는 어머니의 이름을 그대로 쟌느로 불림)를 낳았다.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신고를 하지 않은 부부였기에 그들의 딸은 사생아로 신고 되었다.

니스에 머물면서 풍경화를 모색해보기도 했던 모딜리아니는 어느 날 르느와르의 초대를 받았다. 당시 니스에 살고 있으면서 이미 거장으로 불리었던 르느와르는 모든 방문을 거절했지만 예외적으로 모딜리아니를 집으로 불러 자신의 그림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몇 점의 그림을 둘러 본 그는 차가운 반응을 보인 채 이 나이든 대화가의 면전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능을 높이 샀던 르느와르는 자신의 그림을 팔아 그를 도와주었다고 한다. 괴팍하고 부도덕한 점이 예술가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특징처럼 되어버리기도 하지만 딸을 얻고 생활의 책임을 걸머지게 된 모딜리아니의 신경은 극도로 날카로워 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 번의 시도만으로 그 자리에서 초상화를 그려내곤 했다. 당시에는 부탁을 받고 그리는 초상화는 모델이 자리를 잡는 횟수와 시간에 따라 보수를 받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여러 번에 걸쳐져 데생을 하면서 시간을 끌수록 화가는 돈을 더 받기 마련이었지만 모딜리아니는 한 번에 그려버리곤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그는 야수파의 대가인 마티스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 했다. 아직 모딜리아니를 잘 알지 못했던 마티스는 5분간만 모델을 서주겠다고 했다. 결과를 보고 흡족해진 마티스는 결국 한 시간의 시간을 내주었다고 한다.

1918년 폴 기욤은 자신의 화랑에서 마티스와 모딜리아니, 피카소, 블라맹크를 모아 전시했고, 런던 에서도 같은 전시회를 열어 호평을 받을 수 있었다.

1919년 봄, 다시 파리에 올라온 쟌느는 둘째아이를 임신했다. 겨울이 되었어도 난로를 피울 수 없어 시린 발에 옷을 감고 지내는 가난에 시달렸던 쟌느는 친정어머니의 집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모딜리아니는 카페나 노천에서 밤을 새우면서 거의 자살에 가까운 생활을 했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평화롭고 안정된 삶을 갖고 싶어 쟌느와 정식으로 결혼하겠다는 서약서를 썼다. 때로는 딸이 보고 싶어서 찾아 가기도 했지만, 그를 못마땅해 하던 쟌느의 어머니는 문도 열어 주지 않았고 그러면 그는 집문 앞 계단에 앉아 있다가 말없이 돌아가곤 했다.

즈보로프스키는 런던에서 모딜리아니 전시회를 열어 주었고, 그의 생전 처음으로 초상화 한 점이 1,000프랑이라는 가격에 팔려 나가는 행운도 얻었지만 이미 그의 건강은 한계에 다다랐다. 자신의 종말을 예감이라도 한 듯 그는 친구에게 “이젠 머릿속에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 같지가 않아.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을 것 같군”이라고 말했다.

1920년 1월, 모딜리아니는 파리 자선 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당시 임신 9개월이었던 쟌느는 이튿날 새벽 친정집 5층에서 뛰어내렸다. 모딜리아니가 병원으로 실려 가던 날, 그는 친구에게 “죽어서 다시 만나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살자”라는 말을 쟌느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 약속을 지킨 것일까.. 쟌느는 남은 일생을 모딜리아니의 추억 속에서 지내야 하는 고통을 감수하기보다는 빠른 재회의 길을 선택했다.

이태리 사회당의 국회의원에 당선된 형 엠마누엘은 동생의 장례식을 <왕자처럼 치뤄달라>는 전보를 보내왔다. 몽파르나스의 엘레강스의 종말이라는 시인 쟝 꼭또의 애도와 함께 모딜리아니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파리시민이 모여들어 기인 행렬을 이루었다.

그러나 딸의 시신조차 집에 들여놓기를 꺼려한 쟌느의 집안에서는 아무런 부고도 없이 쟌느를 파리 변두리에 묻었다. 모딜리아니의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몇 년 후에야 두 사람은 뻬르 라 쉐르 묘지에 함께 묻힐 수 있었다.

Phil Coulter - In Loving Mem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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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체리향기 바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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